“나의 재능은 백수일지도”…남유정 ‘자기소개서’, 웃다가 마주하는 청춘의 빈칸

낮 12시 기상부터 취업·결혼·비교의 불안까지…“기록되지 않은 시간도 삶이었다” 유쾌하게 풀어낸 현실 청춘가

 

제이앤엠뉴스 | 낮 12시쯤 일어났다. 그래도 일어난 것만으로 잘한 일이다.

물 한 잔을 마셨으니 건강도 챙겼다. 씻을까 잠시 고민하지만 오늘은 약속이 없다. 물도 아낄 겸 샤워는 내일로 미룬다.

남유정의 신곡 ‘자기소개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취업 준비와 스펙 경쟁을 다룬 노래라고 하기에는 너무 태평하고, 백수의 일상을 그린 노래라고 하기에는 이상하게 마음 한쪽을 건드린다.

남유정은 자신의 모습을 한껏 우스꽝스럽게 표현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 힘들지 않고, 사람들이 심심하지 않느냐고 물어도 하루는 이상하리만큼 짧다.

하지만 노래가 뒤로 갈수록 웃음 사이에 숨겨놓았던 이야기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에게도 사실은 걱정이 있었고, 내일이 두려웠으며, 자신만의 속도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자기소개서에는 왜 ‘빈 시간’을 설명해야 할까

‘자기소개서’라는 제목은 그래서 역설적이다.

우리가 실제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때 가장 난감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아무것도 적을 수 없는 시간이다.

학교를 다니다 취업했다면 학력과 경력을 차례대로 적으면 된다.

하지만 몇 달 또는 몇 년 동안 일을 쉬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왜 쉬었는지 설명해야 한다.

 

무엇을 준비했는지 말해야 한다.

그 시간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도 정리해야 한다.

심지어 힘들어서 잠시 멈췄던 시간조차 훗날에는 그럴듯한 ‘성장의 과정’으로 설명해야 할 때가 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은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납득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남유정의 ‘자기소개서’는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린다.

 

경력의 빈칸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까지 비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웃기지만 점점 웃을 수 없어진다

곡 초반의 화자는 꽤 유쾌하다.

연애 프로그램을 보며 남의 연애를 구경하고 친구의 소개팅 이야기를 들으며 대리만족한다.

결혼은 언제 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자신도 모르겠다고 답한다.

나이를 묻기보다 피부 관리가 중요하다고 능청스럽게 넘어간다.

 

여기에 ‘백수’와 영어 표현처럼 들리는 말을 연결한 언어유희까지 더해지면서 곡은 밝고 장난스럽게 흘러간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분위기가 달라진다.

평소 잘 웃는 사람이지만 그 웃음이 때로는 비어 있다고 고백하고, 하나둘 늘어나는 걱정 속에서 내일이 조금 무섭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장 현실적인 감정이 등장한다.

비교다.

학생일 때는 비슷한 또래끼리 작은 차이를 비교했다면 사회에 나온 뒤에는 비교의 범위가 훨씬 커진다.

 

누군가는 취업했고 누군가는 결혼했다.

누군가는 집을 샀고 누군가는 사업을 시작했다.

SNS를 열면 친구의 승진과 여행, 결혼과 출산, 성공한 일상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예전에는 비슷한 출발선에 서 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서로 완전히 다른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면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뒤처지는 기분이 든다.

 

‘쉬고 있는 사람’과 ‘멈춘 사람’은 같은 말일까

우리 사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쉽게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취업하지 않으면 백수이고,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휴학이며, 경력이 이어지지 않으면 공백기가 된다.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는 이름이 있지만 쉬는 순간에는 ‘빈칸’이 생긴다.

하지만 사람의 삶이 항상 앞으로만 움직일 수는 없다.

방향을 잃는 시간도 있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라 헤매는 시기도 있다.

 

열심히 달린 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야 하는 순간도 있다.

겉으로는 멈춰 있는 것처럼 보여도 다시 움직일 힘을 모으고 있을 수 있다.

남유정의 노래가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야기를 심각한 위로의 언어로 전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스스로를 ‘백수’라고 부르며 먼저 웃어버린다.

그 웃음 덕분에 이야기는 무거워지지 않지만 그 안의 현실까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됐을 뿐이에요”

곡 후반부에는 ‘자기소개서’의 진짜 답처럼 들리는 대목이 등장한다.

하고 싶은 것은 많다.

다만 아직 준비가 덜 됐을 뿐이다.

이 말은 어쩌면 많은 청년들이 자기소개서에는 쓰기 어려운 가장 솔직한 문장일지도 모른다.

사회는 명확한 계획을 요구한다.

5년 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 자신만의 경쟁력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 삶은 그렇게 정리돼 있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가는 중일 수도 있고 여러 번 실패한 뒤 새로운 방향을 찾고 있을 수도 있다.

남유정 역시 세 번의 리메이크를 통해 익숙한 노래를 자신의 목소리로 다시 풀어낸 뒤 이번에는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특히 ‘자기소개서’ 작사에 직접 참여하면서 현재 자신이 바라보는 삶과 고민을 노래에 담았다.

리메이크 프로젝트가 남유정이라는 가수의 가능성을 다시 보여주는 과정이었다면 이번 곡은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지 스스로 써 내려가는 출발점에 가깝다.

 

빈칸도 결국 그 사람의 시간이다

실제 자기소개서는 사람을 몇 장의 문서 안에 정리한다.

학교와 회사, 자격증과 수상 경력은 기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무엇을 고민했는지,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는지, 다시 일어나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마음을 추슬렀는지는 좀처럼 적을 곳이 없다.

 

그래서 누군가의 이력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몇 년이 그 사람에게는 가장 치열했던 시간일 수도 있다.

‘자기소개서’는 그 빈칸을 실패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 쉬어가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속도가 있다고 말한다.

마지막에는 하루를 무사히 살아낸 자신에게 ‘박수’를 보낸다.

대단한 목표를 달성해서 받는 박수가 아니다.

오늘 하루를 끝냈다는 것만으로 받는 커튼콜이다.

 

남들과 비교하면 아직 부족할 수도 있다.

누군가의 기준에서는 늦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은 채용담당자에게 제출하는 자기소개서처럼 모든 문장을 완벽하게 완성한 뒤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한동안 빈칸으로 남겨둘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날 다시 한 문장을 적으면 된다.

 

빈칸이 있었다고 해서 삶까지 비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유정의 ‘자기소개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시간까지도 결국 한 사람을 만들어온 과정이었다고, 꽤 유쾌한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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