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엔제이, 사랑했던 사람의 번호를 지운다는 것…‘니 번호를 지우다’

영화 ‘만약에 우리’ 한 장면에서 시작된 정통 발라드…전화번호와 사진을 지우며 비로소 마주하는 이별

 

제이앤엠뉴스 | 헤어진 사람의 전화번호는 언제 지워야 할까.

더 이상 연락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동안 연락처를 그대로 남겨두는 경우가 있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관계는 이미 끝났지만 휴대전화 속에는 두 사람이 함께했던 시간이 여전히 존재한다.

 

가비엔제이가 신곡 ‘니 번호를 지우다’를 통해 이별 후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을 노래한다.

‘니 번호를 지우다’는 가을의 정서를 담은 정통 발라드로, 스트링 사운드를 중심으로 이별 이후 남겨진 미련과 그리움을 그려낸 곡이다.

특히 이 노래는 막연하게 ‘헤어져서 슬프다’고 이야기하기보다 한때 매일 누르던 전화번호와 함께 찍었던 사진을 직접 지우는 행동을 통해 관계의 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헤어지는 것과 지우는 것은 다른 일

연애가 끝나는 순간은 비교적 명확할 수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을 자신의 일상에서 완전히 지우는 과정에는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하다.

전화번호와 문자메시지, 사진처럼 스마트폰 안에 남겨진 기록은 이미 끝난 관계를 계속 현재로 불러온다.

 

가비엔제이는 이번 곡에서 그중에서도 ‘전화번호를 삭제하는 순간’을 이별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의식처럼 사용한다.

번호를 삭제한다는 것은 단순히 스마트폰에 저장된 몇 개의 숫자를 없애는 일이 아니다.

언제든 다시 연락할 수 있다는 마지막 가능성을 스스로 끊어내는 행동이기도 하다.

그래서 삭제 버튼을 누르는 작은 행동 하나가 이 노래에서는 관계의 끝을 인정하는 가장 큰 결심으로 바뀐다.

 

“왜 헤어졌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니 번호를 지우다’가 그리는 이별에는 명확한 악인이 없다.

누군가의 배신이나 결정적인 사건보다 살아가는 일이 버거워지고 서로에게 소홀해지는 과정 속에서 관계가 멀어진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두 사람이 왜 헤어졌는지조차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사랑했던 기억만큼은 남아 있다.

 

이러한 설정은 곡의 슬픔을 더욱 크게 만든다.

미워해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면 상대를 원망하며 마음을 정리할 수도 있지만, 한때 분명히 사랑했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 멀어졌다는 사실은 쉽게 정리할 대상을 만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화자가 싸우는 대상은 떠난 상대보다 자신의 기억에 가까워진다.

 

영화 속 몇 초의 장면이 한 곡의 발라드로

이번 곡의 탄생 배경도 눈길을 끈다.

가비엔제이 프로듀서 민명기는 영화 ‘만약에 우리’의 한 장면에서 곡의 영감을 얻었다.

극 중 여주인공이 사랑했던 남자와 헤어진 뒤 버스 안에서 그의 전화번호를 지우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정말 사랑했던 사람들이 헤어진 뒤 느끼는 감정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짧게 지나갈 수 있는 하나의 행동이 음악에서는 한 곡 전체를 이끄는 중심 소재가 됐다.

영상과 음악은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도 다르다.

영화가 배우의 표정과 공간, 행동을 통해 이별을 보여준다면 음악은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의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전화번호를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하는지, 삭제하기까지 왜 망설이는지, 지우고 난 뒤에는 정말 괜찮아질 수 있을지를 음악과 목소리로 풀어낸다.

‘니 번호를 지우다’는 영화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그 장면에서 발견한 감정을 발라드의 언어로 확장한 셈이다.

 

스트링과 정통 발라드가 만드는 가을의 이별

사운드에서는 스트링이 곡의 정서를 이끈다.

최근 대중음악에서 비교적 간결한 구성과 빠른 전개가 강조되는 흐름 속에서도 ‘니 번호를 지우다’는 감정을 천천히 쌓아가는 정통 발라드의 문법을 택했다.

이러한 구성은 가비엔제이의 강점과도 맞닿아 있다.

 

이별의 감정을 한 번에 폭발시키기보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기억을 하나씩 꺼내면서 감정의 밀도를 높여가는 방식이다.

특히 전화번호와 사진이라는 구체적인 소재가 있기 때문에 청자가 자신의 경험을 곡에 대입하기도 쉽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 삭제하지 못했던 연락처나 쉽게 정리하지 못했던 사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시대에 달라진 이별의 풍경

이 곡은 동시에 지금의 이별이 과거와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떠올리게 한다.

스마트폰에는 한 관계의 상당 부분이 기록된다.

처음 주고받은 메시지부터 함께 찍은 사진과 영상, 통화 기록, SNS 흔적까지 한 사람과의 시간이 데이터로 축적된다.

관계가 끝났다고 해서 이 기록들이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은 이별 이후 그것들을 하나씩 직접 정리해야 한다.

연락처를 삭제하고, 사진을 지우고, 메시지를 없애고, 때로는 SNS에서 서로의 흔적을 정리한다.

과거에는 기억 속에만 남았을 이별이 이제는 디지털 공간에도 그대로 남는다.

그래서 현대의 이별에는 새로운 과정이 하나 추가됐다고 볼 수도 있다.

 

사람과 헤어진 뒤, 그 사람의 기록과 다시 한번 헤어지는 일이다.

번호를 지운다고 사랑까지 지워질까

‘니 번호를 지우다’에서 가장 역설적인 부분도 여기에 있다.

전화번호를 삭제하려는 이유는 잊기 위해서지만, 동시에 번호를 지워버리면 다시는 기억하지 못할까 두렵다.

잊고 싶으면서도 완전히 잊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다.

이 모순은 이별 이후의 감정을 꽤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면서도 한때 행복했던 시간을 자신의 인생에서 완전히 없던 일로 만들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니 번호를 지우다’가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한 삭제가 아니다.

한 사람을 사랑했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더 이상 그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기 위해 내리는 작은 결심에 가깝다.

휴대전화 화면에서 연락처 하나를 지우는 데는 몇 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몇 초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가비엔제이의 ‘니 번호를 지우다’는 그 짧고도 긴 순간을 노래한다.

번호는 삭제할 수 있어도, 그 번호를 매일 누르던 기억까지 한 번에 지울 수는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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